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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콜라이 부하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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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혁명 이후 === 1917년 2월 러시아 혁명이 일어나자 세계 각국에서 망명한 혁명가들이 조국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트로츠키는 1917년 3월 27일 뉴욕을 떠나 상트페테르부르크로 갔다. 부하린은 4월 초 뉴욕을 떠나 일본을 거쳐 러시아로 돌아와 1917년 5월 초 모스크바에 도착했다. 더 많은 사람들이 제1차 세계 대전에서 발을 빼서 평화를 가져오겠다는 레닌의 약속에 매력을 느끼기 시작하면서 볼셰비키의 당원 수는 1917년 2월 2만 4천 명에서 1917년 10월 20만 명으로 극적으로 증가했다. 모스크바로 돌아온 부하린은 모스크바 시위원회 위원직을 다시 맡았으며 당의 모스크바 지역국 위원이 되었다. 1917년 10월 10일, 부하린은 다른 모스크바 볼셰비키인 안드레이 부브노프와 그리고리 소콜니코프와 함께 중앙위원회에 선출되었다. 볼셰비키는 이전에 모스크바에서 멘셰비키와 사회혁명당에 비헤 소수였으나, 1917년 9월에는 볼셰비키가 모스크바에서 다수를 차지했다. 모스크바 지역국은 모스크바 주변 13개 중앙 지방 각각의 당 조직을 책임졌다. 이 지방은 러시아 전체 인구의 37%, 볼셰비키 당원의 20%를 차지했다. 10월 혁명 동안 페트로그라드에서의 트로츠키처럼 모스크바의 혁명적 정치를 장악한 사람은 없었지만, 부하린은 확실히 모스크바에서 가장 뛰어난 지도자였다. 10월 혁명 동안 부하린은 모스크바 소비에트의 혁명 법령 초안을 작성하고, 도입하고, 옹호했다. 부하린은 그 후 페트로그라드의 혁명 정부에 보낸 보고서에서 모스크바 소비에트를 대표했다. 10월 혁명 이후 부하린은 당 신문인 프라우다의 편집자가 되었다. 이 시기 부하린은 [[좌파공산주의]]자로써 세계혁명의 도래를 열렬히 믿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갈 무렵 러시아의 혼란 속에서 동맹국과의 평화 협상이 임박했을 때 그는 외국 프롤레타리아 계급이 무장하도록 선동하랴고 하면서 전쟁의 지속을 요구했다. 그는 동맹국들에 대해 비타협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서방 협상국과의 우애 관계도 거부했다. 부하린은 레닌이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에 서명하기로한 결정에 격렬하게 반대하면서 좌파공산주의자들의 지도자로 떠올랐다. 이 전시 권력 투쟁에서 레닌의 체포는 1918년 그들과 좌파 사회주의 혁명가들 에 의해 심각하게 논의되기도 했다. 부하린은 1924년 프라우다 기사에서 이 사실을 폭로하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분열되어 온 나라가 망하게 되었다.” 1921년에 그는 자신의 입장을 바꾸고 소련 국가의 생존과 강화를 미래 세계 혁명의 보루로 삼는 레닌의 강조를 받아들였다. 그는 신경제정책의 가장 중요한 지지자가 되었다. 좌익 공산주의자들이 사회주의로부터의 후퇴로 간주한 NEP는 화폐 경제를 다시 도입하고 농업, 소매업, 경공업에서 개인 소유와 자본주의 관행을 허용하는 한편 국가는 중공업에 대한 통제력을 유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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